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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개념 노트/개념어 정리

연작소설 4(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by 다연아빠 2022. 6. 14.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작품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

[서울신문]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도입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1970년대 고도성장 신화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도시 빈민의 삶을 조명한 조세희(63) 작가의 연작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이 200쇄를 넘겼다.1978년 초판 발행 이후 27년간 87만부가 팔려나갔다. 나오자마자 100만부를 훌쩍 넘기는 책들이 적지 않은 요즘이지만 ‘난쏘공’의 이 숫자는 지난 30년간 앞만 보고 숨가쁘게 달려온 우리 사회의 이면을 돌아보게 하는 의미있는 기록이다. 
1일 낮, 조세희 작가를 만난 곳은 서울 대학로의 한 음식점이었다.200쇄 돌파를 자축하고자 마련된 자리였다. 때마침 대학로는 시위 도중 사망한 농민 전용철씨를 추모하고, 쌀 협상 비준을 반대하는 농민대회로 소란스러웠다.“내가 산 세월의 흔적을 가장 가까이에서 담아내고싶어서” 요즘도 카메라를 들고 온갖 시위 현장을 빠짐없이 다닌다는 작가는 바깥 상황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40대 아버지가 중학생 아이에게 ‘난쏘공’을 사줬더니 책을 읽고 나서 ‘아빠, 이 소설 옛날 이야기가 아니네.’라고 했다는 얘길 들었다. 내가 책을 쓸 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아이들이 이제 이 책의 독자다. 어쩌면 그건 욕이다. 그만큼 이 시대가 여전히 어두운 상황에 놓여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는 “좋은 작품을 쓸 자신이 없어” 곧 작가 되기를 포기했다. 작가가 아닌 직장인이 되어 70년대를 살던 그는 재개발지역에서 강제철거현장을 직접 목격한뒤, 이를 토대로 1975년 ‘칼날’을 발표했고, 이후 12편의 난장이 연작을 펴냈다. 그는 “초판때 문학평론가 김현이 ‘그 책 좋아,8000부는 나갈 거야.’라고 하기에 농담 삼아 ‘3년간 혼신을 다했는데 고작 그거야.’라고 대꾸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200쇄까지 찍을 줄은 몰랐다.”고 감회를 밝혔다.“‘난쏘공’은 별게 아니다. 힘들게 살아가는 동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일 뿐”이라는 그는 “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랑이야기여서 30년의 생명력을 가진 게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우리 사회가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쓴 ‘난쏘공’은 그가 ‘벼랑끝에 세운 위험표시 팻말’이었다. 하지만 30년이 흐른 지금도 그는 절박감을 느낀다고 했다.“전체가 노력하지 않으면 힘든 시간은 계속될 것이다.” 
그는 ‘난쏘공’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쓴 ‘하얀 저고리’의 출간을 몇년째 미루고 있다.“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 못내고 있다.”고 설명한 그는 “(책을)내긴 낼 것이다. 죽은 뒤에라도 꼭 내겠다.”며 웃었다.


ㆍ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대하여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난쟁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들이다. 작가는 비상하게 날카로운 촉수로 이들의 삶의 조건과 양상을 파헤침으로써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로 제기된 노동 현실의 심층을 해부한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합쳐 열두 개의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중심 인물들은 난쟁이 일가다. 서울특별시 낙원구 행복동의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던 사십대 후반의 난쟁이와 그 부인, 영수, 영호, 영희 세 남매로 구성된 일가에게 철거라는 위기가 닥친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 근거가 전무한 그들이 '딱지'라 불리는, 재개발 지역의 아파트 입주권을 헐값에 팔아 넘기고 거리에 나앉는 과정이 연작의 표제작에 담겨 있다. '뫼비우스의 띠'의 꼽추와 앉은뱅이 역시 난쟁이 일가와 같은 처지를 당한다. 딱지 장사로 돈을 챙기는 사내에게 접근한 영희가 우여곡절 끝에 딱지를 되찾아오고 꼽추와 앉은뱅이가 그 사내를 살해하는 일련의 과정이 선명한 대립 구도 속에서 그려져 있다.
도시 빈민의 자식들은 노동자로 편입된다. 까만 쇠공을 타고 달나라로 날아간(벽돌공장 굴뚝 속으로 떨어져 죽은) 난쟁이의 자식들은 각각 은강자동차, 은강전기 제일공장, 은강방직 공장에 취직한다. 작가의 시선도 그 공장들이 있는 서해안 항구 도시 은강으로 옮겨 간다. '기계 도시',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클라인 씨의 병' 같은 작품들이 은강을 무대로 전개된다.
"우리 삼남매는 죽어라 공장 일을 했다. 우리는 우리의 생산 공헌도에 못 미치는 돈을 받았다. 네 명의 가족을 둔 그 해 도시 근로자의 최저생계비는 팔만삼천사백팔십 원이었다. 어머니가 확인한 삼남매의 수입 총액은 팔만이백삼십일 원이었다."('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에서)
죽어라 일을 해도 사정은 나아지질 않는다. 야근 시간에 졸다가는 반장이 들고 다니는 옷핀에 팔을 찔린다.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노동자들은 해고되어 블랙 리스트에 오르고 어딘가로 끌려가 조사를 받거나 어두운 골목에서 뭇매를 맞는다.
노동자들의 삶의 실상을 그리자면 그들의 적대 계급인 자본가와 그 주변 세력을 등장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은강 그룹의 소유주 일가와 그들의 수족으로 일하는 율사(律士)가 그들이다. 거기에다가 신애와 그 동생으로 대표되는 양심적인 중산층, 윤호의 가정교사였다가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는 지섭과 같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더해져 소설은 한 사회의 전체상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영수가 은강 그룹 총수의 동생을 살해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물론 작가의 메시지가 그처럼 극단적인 마무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의도는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 주자는 것이었으리라. 작가의 진짜 대안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기 전 영수의 시점으로 이렇게 표현된다.
"아버지는 그런 세상에서는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 버리고, 바람도 막아 버리고, 전깃불도 잘라 버리고, 수도선도 끊어 버린다. 그 세상 사람들은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비도 사랑으로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으로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재비꽃줄기까지 머물게 한다. 아버지는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을 벌하기 위해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사랑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말은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그러나 현실이란 법의 간섭 없이 사랑의 작용만으로 만사가 순탄하게 돌아가는 천상계도 아니고, 악의와 증오가 지배하는 지옥도 아니다. 사랑과 미움, 이기와 이타, 탐욕과 희생이 얽혀 있는 인간계를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법이라는 힘을 갖춘 사랑의 지배를 허락해야 한다는 주장은, 다소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에 바탕을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랑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영수와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은강 그룹 총수의 아들 경훈 중에서 작가가 누구의 손을 들어 줄 것인가는 쉬운 질문이 될 것이다.
아울러 이 작품의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이분법적 대립 구조로 되어 있다. 작가는 공간적으로 도시 변두리의 철거민 촌, 계층적으로 비숙련 노동 계층의 비참한 생활상과 잘사는 계층의 화려하고 타락한 생활상을 대조적으로 제시하고, 못 가진 자의 비참한 삶과 그들의 회의와 방황, 의식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이러한 구조는 작가가 70년대 한국의 사회상을 착취와 피착취의 이분법으로 파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 것이다. 
특히 못 가진 자의 삶의 공간으로 설정된 '행복동'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구도를 확인하고 그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 설정한 것으로 반어적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 작품의 기법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환상과 현실의 교묘한 배합과 상징적 구조물의 중첩, 그리고 시점의 잦은 이동과 연작 형태의 다양한 시각 확보 등에서 새로운 기법을 보여 주었다.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되어 있으나 장면에 따라 순간순간 바뀌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문체는 70년대의 현실 참여적인 작품들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거칠고 투박한 것에서 벗어나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문체를 보이고 있다. 
끝으로, 연작 12편의 제목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① "뫼비우스의 띠" ② "칼날" ③ "우주 여행" ④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⑤ "육교 위에서" ⑥ "궤도 회전" ⑦ "기계 도시" ⑧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⑨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⑩ "클라인씨의 병" ⑪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⑫ "에필로그"


< 참고>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이 상징하는 것

"교사는 분필을 들고 돌아섰다. 그는 칠판 위에다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제군은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 주기를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면 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붙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 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뫼비우스의 띠'에서)
연작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첫머리에 놓여 있는 '뫼비우스의 띠'에는 뫼비우스의 띠와 뫼비우스의 입체를 생각해 보라는, 고교 삼학년 교실에서 수업을 진행하는 수학 교사의 말이 작품 앞뒤에 놓여 있고, 그 사이에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가 끼여 있다. 그 이야기는, 헐값으로 딱지(재개발 지역의 입주권)를 넘긴 앉은뱅이와 꼽추가 브로커의 농간을 알아채고 그를 살해, 복수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연작의 첫머리에 암호처럼 놓여 있는 뫼비우스의 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 소설 속 수학 교사의 말을 들어 보자.
"내가 마지막 시간에 왜 굴뚝 이야기나 하고, 띠 이야기를 하는지 제군은 생각해 주리라 믿는다.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제군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 사물을 옳게 이해할 줄 아는 사람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이제 나의 노력이 어떠했나 자신을 테스트해 볼 기회가 온 것 같다. 다른 인사말은 서로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교사가 공동체의 선을 위한 사회적 윤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한 쪽 면만 갖는 곡면의 세계 즉 뫼비우스의 띠의 눈으로 보는 세계의 구체적 실상은 무엇인가.
철거민들과 그들에게서 입주권을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사 들인 부동산업자 사이의 갈등에서 피해자인 철거민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경제적 착취에 맞서는 또 다른 폭력)이 그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별할 수 없는 현실, 여기에 안팎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놓여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와 같은 비극적 현실에 분노하면서, 이런 비극을 낳는 사회 구조의 모순 쪽으로 눈을 돌릴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안팎이 없는 닫힌 공간을 보여 주는 '클라인 씨의 병'(뫼비우스의 입체)도 연작의 주제를 전달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클라인 씨의 병'에서)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은 그러나 현실에 실재하지는 않는다.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힘과 부의 편중은 갇힘과 나눔을 피할 수 없는 질서로 만들어 놓았다. 난쟁이 일가가 살고 있는 현실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클라인 씨의 병이 보여 주는 것은 '갇힘이 착각일 수 있다'는 발상의 뒤집음이다. 그것은 갇힘이 불변하는 절대적 현실이 아닐 수도 있음을 환기시키는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에 기대어 작가는 헤어날 길 없는 절망적 현실에 갇힌 난쟁이에게 꿈을 불어 넣을 수 있었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살며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가 그것이다.
이 '아름답고 순수한 세계'가 난쟁이의 경우에는 '달나라'이다. '이 땅에서 끝까지 고생하다 바짝 마른 몰골로 죽기' 전에 '힘든 일에 눌려 허우적거리다 숨을 거두기' 전에 난쟁이가 가고 싶어하는 '달나라'는 물론 상상 속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상상 속의 세계는 난쟁이가 그린 '사랑'의 세계이다.
상상 속에서나 그 존재가 가능할 기묘한 현실이 클라인 씨의 병처럼 엄연한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이상, 난쟁이가 소망한 또 하나의 상상 속의 세계가 실재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난쟁이의 소망이 우화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무게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작가의 현실 인식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구성
 이 작품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 영수와 영호, 영희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복합적 구성을 취하고 있음. 
1장 : 서술자는 난장이 큰아들인 영수. 철거통지서를 받음. 가족들의 생활이 과거, 대과거, 현재로 교차되면서 중첩되어 묘사됨. 난장이의 어렵고 고된 삶의 원인이 모순된 불평등한 사회에 있음을 보여줌. 
2장 : 서술자는 난장이 둘재 아들 영호. 영희가 가출하고 입주권을 투기업자에게 팔음. 철거반원에 의해 집이 철거됨. 
3장 : 서술자는 난장이의 막내인 딸 영희. 자신의 집의 입주권을 사간 투기업자를 따라가서 순결을 빼앗김. 투기업자를 잠 재우고 자신의 입주권과 돈으로 입주절차를 마침.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괴로워 함.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도시 빈민의 궁핍한 생활과 자본주의 모순 속에서 노동자의 현실적 패배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소설이다. 
같은 제목의 연작 열두 편 중에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특히 1970년대 한국 소설의 기념비적 예광탄이라고 평가되는 작품이다. 이 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도시 노동자의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엄연한 현실이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철거되는 삶의 터전,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 수준, 열악한 작업 환경, 가진 자의 억압과 술책 등 당시 사회의 모순을 짊어진 한 전형이다. 
작가는 '난장이'로 대변된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의 삶의 모습, 1970년대의 핵심 문제인 노동 조건을 폭로한다. 여기에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의 기법적 새로움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 예를 들면,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꽃을 던지는 영희의 행동이 영호의 꿈속에서인지 실제의 그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팬지꽃과 폐수', '귀여운 소녀와 꽃을 버리는 행위'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시적 호소력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난쟁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근로자들의 삶의 조건과 모습을 파헤침으로써 70년대 이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우리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중첩(重疊), 환상적인 분위기의 조성,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의 기법적 새로움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
그리고 이 글의 결말은 난쟁이 일가의 패배로 끝난다. 아마도 그들은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영희의 절규는 더 이상은 '난장이'로 남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영희는 '거인'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같은 제목의 연작 12편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중편 소설이다. 1970년대 한국 소설이 거둔 중요한 결실로 평가되는 작품으로서 전혀 낙원이 아니고 행복도 없는 '낙원구 행복동'의 소외 계층을 대표하는 '난장이' 일가(一家)의 삶을 통해 화려한 도시 재개발 뒤에 숨은 소시민들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수, 영호, 영희가 차례대로 서술자가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 1부(서술자는 영수) : 철거 통지서를 받는다. 가족들의 생활이 과거·대과거·현재로 교차되면서 중첩되어 묘사되고 있다.
▶ 2부(서술자는 영호) : 영희의 가출. 입주권을 투기업자에게 팔고 철거반원에 의해 집이 철거된다.
▶ 3부(서술자는 영희) : 투기업자에게 순결을 빼앗긴 영희는 금고 안에서 입주권과 돈을 들고 나와 입주 절차를 마치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사회에 대해 절규한다.
도시 빈민의 궁핍한 생활, 그리고 자본주의의 모순에 찬 구조 속에서 노동자의 현실적 패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같은 제목의 연작 12편중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에 서 드러난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엄연한 현실적 문제이자 풀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작자는 난쟁이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노동자의 삶의 모습, 그리고 70년대의 노동 환경을 폭로, 고발하고 있다. 작품 결말부의 영희의 절규는 더 이상 난쟁이로 남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도시 빈민의 궁핍과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서, 특히 노동자의 현실 패배가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되고 있는가를 추적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소외된 도시 근로자의 여러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이다. 즉, 생존에 필요한 최저 수준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 열악한 작업 환경, 고용자로부터 강요되는 부당한 노동 행위, 노동 조합에의 탄압, 폭력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극한적 심리 상태, 그리고 가진 자들의 위선과 사치, 그들의 교묘한 억압 방법 등 산업 사회의 부정적 측면들이 제시되어 있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점을 환기시키는 데만 호소력을 지닌 게 아니라, 문학만이 가능한 정서적인 면을 강하게 갖고 있다. 이를 통해 현실 제시라는 반영적(反映的) 기능과 암시와 함축이라는 정서적(情緖的) 기능을 모두 만족시킨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 넣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꽃을 던지는 영희의 행동이 영호의 꿈속에서인지 실제의 그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팬지꽃과 폐수', '귀여운 소녀와 꽃을 버리는 행위'의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강렬한 시적 호소력을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난장이 일가로 대변되는 가난한 소외 계층과 공장 근로자들의 삶의 조건과 모습을 파헤침으로써 70년대 이 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던 우리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에 과거와 현재의 중첩(重疊), 환상적인 분위기의 조성, 시점의 잦은 이동 등의 기법적 새로움과 함께 서정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여 준다.

(출처 교육과정 평가원 교수ㆍ학습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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